김성윤 기자의 면(麵) 이야기

일본인도 푹 빠진 라멘의 매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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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멘은 자극적이고 강렬하다. 일본요리라고 했을 때 흔히 떠올리는, 담백하면서도 깔끔한 음식과는 전혀 다르다. 국물은 기름지고 농후하다. 국수는 매끄럽고 쫄깃하다. 인간의 미각을 노골적으로 유혹한다. 위험하지만 빠져들 수밖에 없는 치명적 매력의 팜므파탈(femme fatale) 같다. 재료 자체의 맛을 최대한 살려내는 담백한 맛을 추구해온 일본요리에서 어떻게 이토록 어두운 매력을 지닌 이단아가 탄생할 수 있었을까. 어쩌면 평생 반듯하게 살았던 모범생 같은 일본인들이었기에 팜므파탈의 한 번 유혹에 어처구니 없이 쉽게 무너진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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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산시성에서 ‘라몐’으로 태어나다

일본 라멘은 중국이 고향이지만 이국 땅에 성공적으로 정착했다는 점에서 한국의 짜장면과 비슷하다. 라멘의 고향은 중국 산시성(陝西省)이다. 산시성은 국수의 종주국을 자부하는 중국에서도 ‘국수의 고향’이라 불린다. 국수 종류가 엄청나게 다양하고, 자주 많이 국수를 즐긴다.
산시성은 국수가 발달하기에 이상적 조건을 두루 갖췄다. 남부는 밀 재배에 적합한 평야지대이고, 북부는 기장 귀리 메밀 콩 따위 다른 곡물을 기르기 알맞은 고원지대이다. 중국 전체 석탄 생산량의 3분의 1을 차지할 정도로 주요 석탄 산지이기도 하다. 국수를 맛있게 삶으려면 센불을 일정하게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석유나 화석 같은 화석연류가 없던 옛날에는 석탄만큼 화력이 우수한 연료도 없었다.
특히 산시성은 간수가 풍부하다. 간수는 소금물에서 소금(염화나트륨)을 결정화시키고 남은 액체. 알칼리 성분을 다량 함유한다. 반죽할 섞어주면 탄성을 극대화한다. 간수를 섞어 밀가루를 반죽하면 그냥 물만 섞은 밀반죽보다 탄성이 2배 이상 늘어난다. 쉽게 말해 헐씬 쫄깃한 국수를 봅을 수 있다는 소리다.
이런 조건에서 라몐(拉麵)이 명나라(1368~1644) 때 산시성에서 출현했다. 손으로 잡아당겨 면발을 늘인 국수다. 납(拉)은 ‘늘이다’ ‘잡아단기다’는 뜻이다. 간수가 있었기 때문에 탄생할 수 있었다. 간수를 섞은 밀가루 반죽은 손으로 잡아당길 수 있을 정도로 점성이 좋았다. 간수를 넣은 국수는 면발이 매끄럽고, 특유의 노란색과 독특한 냄새를 갖는다. 석회질 같기도 하고 탄산 같기도 한 이 냄새 때문에 라몐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지만, 싫어하는 이들도 많다.
라몐은 중국 전역으로 퍼졌다. 산시성이 있는 중국 화북(華北)에선 라몐, 화(華)중(中)에선 간몐(瀚麵), 화남(華南)에서는 다몐(打麵)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일본으로 건너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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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으로 ‘귀화’하고 ‘라멘’으로 이름 바꾸다

라몐이 언제 어떤 경로로 건너갔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화베이에서 건너간 것 같기는 한데, 마죽조림(말린 죽순을 삶아 흙 속에서 발효시킨 음식)이나 차사오(燒肉.달착지근한 양념을 바르고 붉게 물들여 숯불에 구운 중국식 바비큐요리), 조림 달걀 같은 고면은 화중과 화난의 음식이기 때문이다.
일본인들은 라몐을 라멘이라고 불렀다. 자장몐이 짜장면으로 한국화된 것과 마찬가지다. 주카멘(中華麵), 주카소바(中華そば)라고도 불렀다. 주카는 한국말로 중화니까 중국을 뜻하고, 멘은 당연히 국수를 말한다. 소바는 일본에서 메밀국수뿐아니라 국수 전체를 통칭하기도 한다.
일본 문헌에서 라멘이 처음 등장하는 건 1918년 발간된 해군 취사병을 위한 교본인 ‘해군주계병조리술교과서(海軍主計兵調理術敎科書)’이다. 여기에는 중화면과 비슷한 오식초면(五式炒麵)과 하인면(蝦仁麵)이 나오는데, 시나우동(支那うどん)을 사용한다고 설명한다. 지나는 일본에서 중국을 낮춰 부르는 말로, 현재는 공식적으로는 사용되지 않고 있다.
라멘이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요코하마 차이나타운 노점에서 탄생했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당시 요코하마 노점상이 팔던 국수는 손으로 늘린 라멘이 아니라 칼로 써는 중국의 랴오멘(柳麵)으로 추정된다. 1922년 삿포로 홋카이도제국대학 앞 중화식당에서 산둥성 출신 화교 왕문채가 처음 만들었다는 설도 있다. 왕문채가 만든 로우스몐(肉絲麵)을 라멘으로 이름을 바꿨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로우스몐은 실처럼 가늘게 썬 돼지고기와 죽순, 파를 달걀흰자와 논말가루에 묻혀 기름에 살짝 튀긴 다음 국수와 함께 요리한 것으로 라멘과는 영 달라 설득력이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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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카타 스타일 라멘이 일본 전역 제패

라멘은 이후 이따금 문헌에 등장하긴 하지만 대중적 인기는 얻지 못한 듯하다. 그러다 일본이 2차 세계대전에 패하고 나서 중국에서 돌아온 사람들이 라멘을 잊지 못하고 찾으면서 급속도로 인기를 얻는다. 라멘이 이토록 큰 인기를 얻은 건 토착화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일본인 입에 맞게 변신했기에 한때의 유행이 아닌 일본 음식문화의 일부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라멘은 크게 다섯 지역 스타일로 나뉜다. 삿포로는 라멘의 발상지란 설이 있을 정도로 라멘이 성(盛)한 도시다. 삿포로에만 라멘가게가 2000개가 넘고, 특히 삿포로 최대 유흥가인 스스키노 라멘골목에는 라멘 명가(名家)가 수두룩하다. 삿포로 라멘은 추운 날씨를 이겨낼 수 있도록 국물이 기름지고 진하다. 돼지뼈와 전갱이, 말린 날치, 채소 자투리를 넣고 푹 끓인 다음 버터, 닭 기름, 라드로 맛을 더한다. 어떤 양념으로 간을 맞추느냐에 따라 된장 맛과 간장 맛, 소금 맛으로 구분된다. 된장 맛이 기본이다. 미소(일본 된장)을 풀어 구수하고 개운하나, 한국인 입에는 짜다고 느낄 수도 있다. 1963년 라멘점 ‘아지노산페이’ 주인이 돼지고기와 채소, 두부, 곤약 따위를 넣고 된장을 풀어 끓이는 일본 음식 ‘돈지루’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미소라멘을 처음 만들었다. 마죽조림, 차사오, 숙주 외에도 연어, 옥수수, 감자, 게, 가리비 가튼 홋카이도 특산물을 고명으로 얹는다. 강력분으로 굵게 뽑은 면발이 딱딱하달 정도로 쫄깃하다.

규슈(九州)라멘은 1955년쯤 구루메에서 탄생해 규슈 전역으로 퍼졌다고 전해진다. 규슈 중에서 특히 하카타 지역이 유명해 ‘하카타 라멘’이라 불리기도 한다. 국물에서 돼지뼈 풍미가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처음에는 이것이 거북하지만, 나중에는 이것 때문에 규슈 라멘에 중독된다는 마니아가 많다. 최근 일본 라멘계를 제패한 것이 바로 하카타이다. 돼지뼈를 기본으로 닭뼈와 가다랑어포, 채소 자투리를 센불에 오래 곤다. 뼈를 오래 끓인 국물이 뽀얗고 진하다. 강력분으로 굵고 쫄기하게 뽑은 면발을 사용한다. 차사오와 마죽조림, 어묵이 기본 고명. 여기에 생선, 조개, 소고기, 돼지고기, 닭고기, 살라미 소시지, 치즈, 마늘, 김치, 교자만두 등 다채로운 고명을 얹기도 한다.
도쿄 라멘은 맑은 간장 맛이 기본이다. 1910년 아사쿠사에 있는 ‘라이라이켄(來來軒)’이 도쿄 라멘의 시초라고 알려졌다. 면발이 가늘고 쫄깃하다. 차사오, 마죽조림, 숙주가 기본 고명이다. 도쿄와 더불어 유명세를 타는 곳이 기타가타이다. 기타가타 라멘은 돼지뼈와 멸치를 넣어 끓인 국물이 담백하면서 동시에 중후하니 신기하다. 간장 맛이 기본이다. 오사카 라멘은 다시마와 뱅어포로 국물을 낸다. 다른 지역보다 짜지 않고 단 편으로, 오사카가 속한 간사이 지역 특생이 드러난다.
다섯 지역 라멘 중 규슈와 삿포로, 기타카타가 요즘 ‘3대 라멘’으로 꼽힌다. 그러나 유명 라멘점들은 특정 지역이나 스타일에 얽매이지 않는다. 재료와 조리법을 다양하고 창조적으로 뒤섞어 자신만의 개성 있는 맛을 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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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스턴트 라면 벗어나 진짜 라멘 맛 알아가는 한국

인스턴트 라면에 길들여졌던 한국사람들도 진짜 라멘의 매력을 알아가고 있다. 한국에서 라멘 제대로 한다고 소문난 가게는 홍대 주변에 몰려있다. ‘나고미라멘’은 일본 전국 라멘대회에서 1등을 차지한 ‘야마고야’의 제자뻘 되는 가게다. 돼지뼈를 72시간 끓인 돈코츠 국물을 기본으로 고명을 달리 한 세 가지 라멘이 있다. 이중 반숙 달걀과 죽순을 얹은 ‘나고미 라멘’이 가장 인기다.

홍대와 상수동에 있는 ‘하카다분코’는 한국에 돈코츠 라멘을 처음 소개했다. 돼지뼈 육수에 가늘게 뽑은 국수를 말아 낸다. 진한 맛의 인라멘과 가벼운 맛의 청라멘이 있다. 홍대에서 멀지 않은 신촌 ‘코코로라멘’에 들어서면 숯불에 직접 구운 차사이 냄새가 식욕을 자극한다. 찐득하달만큼 진한 돈코츠 국물은 역시 하카타 스타일이나, ‘야키차슈’라고 부르는 차사이는 홋카이도 지방에서 내려오는 비법의 데리야키 소스를 바른 흑돼지고기를 숯불에 굽는다.
한남동 ‘라멘 81번옥’은 4인분 분량의 ‘점보라멘’을 20분 안에 국물까지 다 먹으면 돈을 받지 않는다. 81은 일본 국가번호이다.

/김성윤 조선일보 음식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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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멘, #돈코츠라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