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국수는 베트남, 태국 등 동남아시아와 중국 남부 지역에서 밥만큼이자 즐겨 먹는 주식이다. 쌀국수를 만들려면 우선 쌀을 곱게 가루 내야 한다. 쌀가루를 물과 섞어 우유처럼 뽀얀 쌀가룻물을 만들어 뜨겁게 가열한 금속판 위에 전 부치듯 얇게 편다. 꾸둑꾸둑 마르면 판에서 떼어내 차곡차곡 쌓아 가늘게 썬다. 냉면처럼 가는 것부터 칼국수 정도 굵기, 이탈리아 라사냐(lasagna)처럼 넒적한 것까지 면발이 다양하다.
한국에서는 쌀국수라고 하면 베트남 퍼(pở), 더 정확히는 소고기 국물에 만 ‘퍼보(phở Bò)’를 흔히 떠올린다. ‘포’라고 더 널리 불리지만, 현지 발음은 퍼에 가깝다. 퍼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설(說)이 있다. 프랑스 점령 시기 탄생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채소와 고기를 푹 곤 프랑스 음식 포토푀(pot au feu)의 ‘푀’가 ‘퍼’가 됐단 것. 베트남에서는 프랑스 점령 전까지 소고기를 먹지 않았고, 당연히 소고기 육수에 쌀면을 말아내는 현재의 퍼는 없었다. 또다른 설은 프랑스 식민지 시절 방직산업이 활발했던 남딘 지역에서 프랑스인과 베트남인 모두를 위해 만든 음식이 퍼가 되었다고도 한다. 남딘은 하노이에서 100km 가량 떨어진 지역으로, 하노이의 유명 퍼집 주인들이 남딘 출신이 많다.
퍼는 베트남의 수많은 국수 중 하나일뿐, 베트남 국수 전체를 아우르는 말은 아니다. 베트남 말에는 ‘국수’라는 단어가 없다. 저마다 개성이 워낙 강한 면 음식을 국수라는 단어 하나로 뭉뚱그릴 수 없기 때문이 아닐까 짐작하기도 한다. 퍼는 0.5cm 정도 넓이의 납작한 쌀면을 일컫는다. 퍼보다 가는 쌀면은 분이라고 부른다. 갈색의 쌀면 반다, 반건조 쌀면으로 한국의 중면 정도 굵기인 후띠에우도 있다. 쌀과 타피오카 가루를 섞어 만드는 바인까인, 두툼하고 거친 까오러우, 당면인 미엔, 달걀과 밀가루로 만든 미, 얇고 넓게 엉켜 붙은 면에 다른 재료를 싸먹거나 그 자체로 소스에 찍어 먹는 반호이도 있다.
베트남은 음식은 크게 북부와 중부, 남부로 나뉜다. 면요리도 이렇게 지역에 따라 셋으로 크게 구분된다.
하노이를 중심으로 하는 북부 음식은 담백하다. 덜 맵고 덜 달고 덜 기름지다. 재료 자체의 맛이 드러난다. 소스로는 연하게 희석한 느억맘(생선액젓)과 새우를 오래 삭힌 젓갈 맘똠을 많이 사용한다. 다른 지역에 비해 향신료 사용도 적다. 북부의 국수로는 퍼보와 닭고기를 얹은 퍼가, 돼지고기 완자를 구워 소스를 붓고 여기에 면을 적셔가며 먹는 분짜, 면보 씌운 찜기에 묽은 반죽을 부드럽게 익혀 소스에 찍어먹는 바인꾸온농, 맑은 닭고기 육수에 가늘게 찢은 닭고기 달걀지단 표고버섯을 얹어 먹는 분탕, 게살을 넣어 만드는 바인다꾸어, 우렁이와 푸른 바나나 두부 토마토의 조화가 기막히 분옥쭈오이더우, 튀긴 두부와 함께 먹는 분더우맘똠, 계피향 나는 베트남식 소시지를 얹어 먹는 분목, 작은 게를 껍질째 갈아 넣는 분지에우꾸어, 튀긴 실장어를 얹은 당면 국수 미엔르언 등이 있다.
중부지방은 매운맛을 좋아한다. 후에, 다낭 등이 중부에 속하는데 특히 베트남 옛 수도인 후에는 궁중음식의 영향이 많이 남아 호화롭고 정성 들인 음식이 많다. 중부의 국수로는 매콤하게 먹는 소고기 국수 분보후에, 달콤하게 양념해 구운 소고기를 넣어 먹는 분팃느엉, 쫄깃한 면발에 게살을 넣어 끓이는 바인까인꾸어, 재첩을 넣고 비벼 먹는 분헨, 생선을 넣고 걸쭉하게 끓인 바인까인 까록, 다낭의 대표 국수로 노란색 쌀면을 사용하는 비빔국수 미꽝, 툭툭 끓어지는 매력의 호이안 지역 명물 까오러우 등이 있다.
남부 음식은 단맛이 강한 편이고 코코넛밀크를 기본으로 한 음식이 많다. 남부의 국수로는 진한 소고기 스튜에 후띠에우 면을 말아 먹는 후띠에우보코, 돼지고기와 새우 고명의 대표적인 남부 국수 후띠에우남방, 코코넛 커리에 분을 적셔 먹는 분까리, 스프링롤을 툭툭 잘라 넣고 채소와 함께 비벼 먹는 분짜조, 우동과 비슷한 면에 돼지의 정강이 부위를 넣어 먹는 바인까인저해오, 생선 살을 넣는 분까, 생선 살과 해파리를 함께 사용하는 냐짱 지역의 국수 분까쓰어, 양념한 고기를 구워 면에 싸 먹는 바인호이팃느엉 등이 있다.
베트남 음식은 음양(陰陽)의 조화를 중시한다. 찬 성질의 재료를 요리할 때는 맵고 뜨거운 양념으로 부족한 기운을 보완하고, 몸에 열을 일으키는 음식에는 차가운 성질의 채소를 함께 먹는 식이다. 국수에 곁들여 나오는 채소나 향채도 마찬가지다. 특정 국수에 유독 곁들여지는 게 있다면 낯설고 첫입에 맞지 않더라도 참고 시도해보길 권한다. 오랫동안 먹어오면서 찾아낸 찰떡궁합일 확률이 높다. 생으로 먹기 부담스러우면 살짝 데쳐달라고 부탁하면 된다. 여기에 초록색 라임을 짜 넣고, 테이블에 놓인 고추 소스나 마늘 식초 소스 등을 가미하는 등 입맛과 취향에 맞게 맛의 변주를 시도해보자. 하나의 면 요리로 다양한 미각체험을 즐길 수 있다.
국내 소개되는 외국 음식은 주로 젊은 여성들이 좋아한다. 하지만 베트남 쌀국수는 남녀노소 누구나 즐긴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소고기 국물과 쌀이라는 한국인 입에 익숙한 재료를 사용해 쉽게 친해졌다. 뜨거운 국물을 좋아하는 한국인 취향과도 맞아떨어졌다. 술 많이 마신 다음 날 ‘해장국’ 대용으로도 인기가 높다. 지방 소도시에서도 쌀국수 전문점을 볼 수 있다. 외국음식이 이처럼 지방에서 받아들여지는 건 드문 사례다. 업계에서는 “한국 농촌으로 시진 온 동남아 여성이 많기 때문”이라고 분석하기도 한다.
서울 종각 뒤 좁은 골목에 숨듯 자리 잡은 ‘에머이’(02-733-0588)는 매일 매장에서 쌀국수를 직접 만드는 드문 가게다. 국내 베트남 국숫집에서는 보통 현지에서 수입한 건면(乾麵)을 사용한다. 갓 뽑은 생면(生麵)은 식감이 건면과는 완전히 다르다. 훨씬 부드러우면서도 쫄깃하고 매끄럽다. 쌀국수 만드는 과정을 보기 위해 주방에 들어가니 한여름처럼 덥고 습했다. 권영황 셰프(이사)는 “쌀국수가 생각보다 까다롭다”며 “쌀국수를 뽑을 때는 주방을 베트남 현지와 같은 조건으로 맞추지 않으면 제대로 생산되지 않는다”고 했다.
서울 성산동 ‘싸이공레시피’는 쌀국수에 삶지 않은 생 소고기 사태를 올린다. 뜨거운 쌀국수 국물에 육회처럼 얇게 저민 사태가 살짝 익는다. 삶은 사태보다 훨씬 부드러운 식감이 매력적이다. 양파도 절이지 않은 생 양파를 아주 얇게 썰어서 올린다. 여기에 튀긴 마늘을 곁들인다. 숙주는 쌀국수 아래 그릇 바닥에 깔려 있다. 국수와 국물 맛을 최대한 가리지 않기 위한 배려라는 설명이다. 합정동 ‘리틀파파포’(02-326-2788)는 베트남 본토 맛에 매우 근접한 쌀국수를 낸다는 평가를 받는다. 가느다란 버미첼리 국수와 채소, 고기를 잔뜩 넣어 속이 꽉 찬 춘권 튀김도 훌륭하다.
강남 신사동 ‘리틀사이공’(02-547-9050)은 쌀국수를 국내에 가장 먼저 소개한 식당 중 하나다. 처음 먹는 한국인도 거부감 없는 진한 국물이 매력적이다. 쌀국수와 함께 쌀종이(라이스페이퍼)에 돼지고기나 새우, 채소를 넣고 말아서 기름에 튀겨낸 짜조 또는 쌀종이를 물에 적셔 각종 재료를 싸 먹는 월남쌈을 함께 시켜 먹는 손님이 많다.
프랑스 식민지였던 탓인지 베트남은 동남아에서 드물게 빵이 맛있는 나라다. 이태원 경리단길 ‘레호이’(070-4242-0426)는 쌀국수와 함께 ‘반미’로 이름났다. 반미는 바게트빵을 길게 반으로 갈라 각종 채소와 고기로 채운 베트남식 샌드위치다.
경기도 안산 다문화음식거리에 있는 ‘고향식당’(02-492-0865)은 베트남 사람들이 고향이라고 느낄 법한 맛과 분위기다. 베트남 출신 주인과 주방장이 운영하는 가게답다. 바삭하게 튀긴 돼지갈비가 딸려 나오는 돼지갈비밥이나 베트남식 백반처럼 다른 베트남 식당에서 보기 힘든 메뉴가 다양하다. 서울 한남동 한강진역 일대는 요즘 가장 트렌디한 동네로 꼽힌다. ‘타마린드’(02-794-8780)는 이곳에 있는 식당답게 분위기가 매우 세련됐다. ‘그린커리 코코넛 치즈 파스타’처럼 외국의 재료와 요리법을 가미해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베트남 음식을 낸다.
/김성윤 조선일보 음식전문기자